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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드라마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 - 일드 " 파견의 품격"


노동절에 본 일본드라마 " 파견의 품격 "

올 노동절 연휴는 원화시세변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황금연휴와 겹쳐 지속적으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을 명동에 들끓게 했다. 명동거리를 지나갈때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일본말...일본의 중년여성뿐아니라 일본 젊은 남녀들도 꽤 눈에 띤다.
우리나라는 노동절로 시작되서 석탄일이 낀 우연한 황금연휴지만 매년 4월29일 천왕의 생일과 헌법의 날 녹색의 날 어린이 날로 이어진 일본의 황금연휴에 경제대국, 회사인간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인들은 정작 노동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류는 중년아줌마나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 비비크림 쇼핑을 빼면 한국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일본 젊은이들...얼마전엔 일본 여자애들이 밑도 끝도 없이 욱일승천기를 들고 명동 거리에서 생쑈를 벌였다던데...
황금휴가를 즐기려고 명동에 몰려든 젊은 일본인들...가까운 듯하지만 멀게 느껴지는 일본 젊은이들의 직장생활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진다.
2007년에 방송된 일본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인기드라마 " 파견의 품격 " 이란 드라마가 눈에 띤다.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에서 방송된 바 있어 네티즌의 호평이 보이고 일본에서도 높은 시청률과 웰메이드라고 소문이 났다는 이 드라마를 노동절 연휴에 감상해봤다. 멕시코발 돼지감기는 아니지만 요즘 감기는 정말 독하고 오래간다. 황금연휴 좋은 날씨에 방구석에서 휴지를 끌어앉고 드라마나 보고 있어야 하다니..ㅜㅜ

3개월마다 짤리는 일본 비정규직 노동자  
 
그러나 한국배우 예지원을 닮은(얼굴도 캐릭터도 완죤 비슷. 만약 한국에서 리메이크한다면 영순위일듯.) 일본 여배우 시노하라 료코가 낮에는 똑부러지게 일 잘하는 무뚝뚝한 사무원이 되고, 밤이면 고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고를 추면서 회사에 위기가 닥칠때마다 만능 슈퍼우먼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는 재미란 황금연휴 중 하루를 할애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인 설문조사 1위라는 고이즈미 총리의 잘생긴 배우아들 고이즈미 코타로까지 조연으로 나와주시고 최근 일본 샐러리맨들의 직장 풍속도를 보게 되니 뭐랄까...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직장인들의 생활이란 크게 다를것이 없어 보인다. 또한 정사원에 비해 철저하게 차별받고 있는 파견직 사원의 처지가 적나라하고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똑같이 일을 해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 월급에도 불구하고 정사원보다 많은 점심식사값..정사원이 망가트린 커피머신은 수리공을 불러서 처리해도 파견사원이 망가뜨리면 새 기계를 변상해줘야하는 현실...담배나 커피심부름 같은 허드렛 잡일을 떠안기면서 파견사원은 책임감이 없다며 업무적으로 철저히 소외시킨다. 파견직 사원은 아무리 회사에 중요한 조언을 하고 뛰어난 실적을 올려도 정사원이 한 것으로 간주되며 정작 표창은 정사원이 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기획안을 제출해도 파견사원의 이름으로 제출한 기획안은 채택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사원의 일자리를 잠식한다며 그들은 파견직 사원을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구박한다. 게다가 여자나이 30대중반이 되면 이런 파견일자리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슈퍼마켓 판촉행사의 단발 아르바이트나 전전해야 되는게 드라마속 한 기업을 통해 본 일본 파견직의 실상이다.
뭐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고용계약이 3개월 단위라니...현재 일본의 시스템은 우리나라보다 더 빡빡하고 타이트하게 굴러가는 것 같다. 



파견근로 불평말고 만능사원이 되라????

이런 파견직의 일터에 어느날 특A급 파견직 여사원 오오마에가 나타나 회사에 돌풍을 일으킨다. 도도해 보이는 이 여사원은 회사에서 잡일은 절대 하지 않고 직속 상관의 명령외엔 듣지 않으며 꼿꼿한 자세로 순식간에 정사원 몇명이서 달라붙어야 가능한 일을 척척 해치우며 하루 8시간을 빡빡하게 채운뒤 회식과 잔업은 당당하게 거부하고 항상 6시 땡치기 무섭게 칼퇴근해버린다. 
또한 수십가지의 자격증을 가진 그녀는 회사가 위기에 몰릴때마다 대활약을 펼친다. 조리사가 되어 직접 판매할 샘플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승강기가 고장났을땐 승강기 점검원이 되어 밧줄을 탄다. 거래처 사장딸의 느닷없는 분만을 도와주기 위해 조산원으로 변신해서 사장의 환심을 사 계약을 따내고 판촉 행사의 방송아나운싱으로 매출을 쑥쑥올리는가 하면 개 훈련사가 되어 난동을 부릴뻔한 개를 찾아내고 아무도 모르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바이어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거나 참치쇼를 펼쳐 신용을 잃을뻔한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한다. 이렇듯 못하는게 없는 만능사원이지만 그녀는 파견직이라 무시하는 정사원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 너희가 파견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나 하느냐? "
" 정사원이라고 일도 안하고 놀면서 월급을 좀먹는 너희들은 한심하다." 

많은 파견직 사원은 이렇게 당당하고 능력있는 오오마에를 본받고 싶어하고 사람들은 항상 회사에 위기가 닥칠때마다 그녀를 떠올리지만 정작 그녀는 3개월 계약기간이 지나면 총총히 회사를 떠나고 만다. 그동안 수많은 회사의 정사원 스카웃제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파견직을 고집한다. 회사가 바뀔때마다 최고의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복잡한 인간관계는 일절 맺지 않은채 항상 주어진 시간외에는 회사에 관여하지 않는 그녀는 왜 파견직만을 고집하게 된것일까?   
한때 잘나가는 은행의 정사원이었던 그녀는 은행의 도산으로 정리해고 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었다. 비정규직이 되어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동안 아마 그녀는 깨달았으리라. 자본주의 사회에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아무리 회사에 평생을 충성해도 믿을수없는게 기업이고 정사원이라는 철밥통마저도 나이를 먹어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내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만능사원 오오마에는 파견직 근로자에게는 워너비요, 기업가에게는 최고의 노동력이었다.

하지만...3개월 파견근로후 엄청난 월급을 받고 외국여행을 하면서 항상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그녀가 진정한 의미의 " 파견직 사원"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는 고액연봉의 전문프리랜서라고 불러야 할것 같다. 사람들은 파견직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정규직을 마다하고 비정규직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안정적이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정규직이 되고 싶어한다. 이쯤 되니 슬며시 이 드라마의 시커먼 의도가 엿보인다. 파견직에 문제가 많지만 그건 어쩔수없는 자본주의의 기업시스템이니 이것을 받아들여라? 능력있는 사원이 되면 아무리 파견직이라도 " 품격 " 이 달라진다? 물론 드라마니까 이런 만능사원은 존재할수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파견근로 불평말고 만능사원이 되라. 아무리 비정규직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을 가지면 쿨하게 살수 있다?

뭐...전혀 틀린말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란 노회찬씨가 말했듯 동물의 왕국(?)이니까. 약자를 이기는 경쟁력을 가진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같은 곳이니까....늙어죽을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기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게 현대인의 운명이니까....경쟁력에서 진 인간은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소모품같은 인생을 살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동물의 왕이 되는 건 사자뿐...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벌이지만 내몰리는 다수위에 결국은 소수만이 부를 누리는 정의롭지 못한 현대정글사회를 그러려니 곱게 받아들이기만 해야하는것인가? 하루 일과에 지친 직장인이 퇴근 후 드라마속 오오마에같은 슈퍼우먼 드림과 환상을 즐기면서???
 
만능사원 오오마에보다 시위하는 한가인! 

비정규직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를 보다보니 문득 2005년의 우리 드라마 " 신입사원 "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비정규직 사원으로 등장한 한가인이 계약갱신을 하지 못하게 되자 비정규직의 부당함에 맞써 회사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다. 문정혁이 출현했던 신입사원의 좌충우돌 성공담을 다룬 이 드라마는 파견의 품격같은 비정규직 소재의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직장인 청춘드라마였고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비정규고용문제를 잠시 드러내주었고 여주인공의 신분이 비정규직으로 설정된 바람에 잠시 이런 에피소드가 나오게 된것에 불과한 장면이었지만 당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마치 주인과 하인을 떠올리는 듯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업무풍경에도 새삼 씁쓸했고 한가인은 그것을 "일인시위" 라는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했던것이다.

물론 그 드라마가 비정규직문제를 투쟁으로 돌파하자고 나서서 말하는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단지 지금까지도 끊이지않는 사회문제인 비정규고용과 비정규직 차별철폐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것일뿐이다. 
하지만 나는 만능사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환타지로 승부하는 일본 파견직원 오오마에보다는 능력없는 개인이지만 자신과 같은 입장의 수많은 비정규직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용기를 낸 현실적인 한가인이 더 마음에 든다. 그것이 내가 연휴가 아깝지않을만큼 재미있게 파견의 품격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웬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였다.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일본의 차가운 시선...차별받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못한채 어두운 현실을 긍정하라고 강요받고 있는 듯한 일본인의 모습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