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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드라마

배용준의 첫사랑

1996년의  드라마 "첫사랑" 

1996년 방송된 드라마 첫사랑을 봤다.  당시 이 드라마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저녁시간에 일찍 돌아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봤겠지만 이젠 가물가물해진 그 드라마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본다.


첫사랑이란 대부분 청소년기 초반에 찾아오는 법...그리고 그 이후 생애를 걸쳐 결코 쉽게 잊혀질 수 없으며 그 열정과 강렬함은 사람에 따라 이십대 초반 인생의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한다.

부잣집 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다가 억지로 군대로 끌려가고 나중엔 반신불수까지 되는 파란을 겪게 되는 찬혁..

자신의 부모 때문에 궁지에 몰린 첫사랑에 대한 번민으로 대학에도 낙방.. 꼭꼭 숨어버린 애인을 찾아 서울 철거민촌 달동네를 헤메고 맹랑하게 부모를 감쪽같이 속이면서 가출까지 해버리는 해프닝을 벌이는 효경...

그녀가 결국 대학에 가려고 이를 악물은 것은 첫사랑을 만날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지만 그 희망도 물거품이 되자 캠퍼스도 그녀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효경의 첫사랑에 대한 집념은 첫사랑 찬혁의 죽음이라는 거짓정보로 자살미수에 그친채 일단락 되고 만다




 

첫사랑의 군상들


“첫사랑”이란 제목에 걸맞게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10대시절부터 시작하며 이후 이십대 후반까지 주연인 최수종, 이승연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이 엮어가는 제각기 다른 첫사랑을 보여준다.

극의 중심인물인 효경과 찬우의 찢어질듯 좀처럼 찢어지지 못하는 무명실처럼 질긴 운명같은 사랑

형의 애인을 남몰래 가슴에 담은채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내다 결국 진한 형제애로 덮어버리는 찬우의 짝사랑.

아는 노래는 아버지 18번인 뽕짝밖에 없다던 배용준을 위해 캠퍼스 방송국에서 트로트를  틀고 첫 눈에 반한 찬우에 대한 애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은채 오랜시간을 기다리면서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당찬 여기자 최지우의 짝사랑.

야간업소 연주가 주정남을 향한 찬우 누나 송채환이 보여주는 백프로 무공해 유기농같은 사랑..

소녀시절부터 동네오빠 찬혁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어도 그마음 변치않는 헌신적인 신자의 짝사랑

고향 친구 찬혁의 일이라면 두손 두팔 걷어부치는 의리남 동팔이의 신자에 대한 은근슬쩍 짝사랑 이후 결국 나좋다는 여자를 선택한 현실적인 사랑까지.... 


 


 

그러나 이 드라마가 철딱서니 없는 아해들의 첫사랑 이야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다른 첫번째는 바로 모진 가난속에서도 따듯한 가족의 정이 콸콸 넘쳐흐르는 진솔한 가족애였다.


극장간판 그리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소주한잔에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니~를 구성지게 부르는 이제는 자식밖에 남은것이 없는 혼자 된 아버지...

머리가 모자라게 태어난 죄, 가난한 집 맏딸이라는 죄로 학교를 등진채 아버지와 두 남동생의 살림을 도맡아하면서 남동생이 타온 상장을  보물단지처럼 여기며 사는 순진무구 천연기념물 누나 송채환...

그림에 천재적 소질이 있지만 가난한 집 장남인 탓에 그저 가족의 대들보가 되고자 하는 과묵한 형 최수종...

형을 고호같은 화가로 만들기 위해 태호같은 동생이 되겠노라며 형이 깡패들에게 쫒기자 자기가 대신 나서서 대신 흠씬 몰매를 맞고 형을 구하는 동생 배용준...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라도 한 듯한 이 가족은 판잣집 단칸방에서 끊임없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의 대사를 나누며 살아간다.

한 가족을 통해서 그 시대가 보여주는 이야기


학교에서 매번 허겁지겁 알바시간에 맞춰 뛰어다니며 책을 떨어트리던 배용준과 자주 마주치던 최지우...그녀는 학생기자로 철거민촌 달동네를 취재하게 되고 거기서 배용준을 우연히 만나고 그가 가난한 고학생이라는것을 알게 된다.

배용준을 멀리서 짝사랑하던 최지우... 부유하게만 자라왔던 그녀는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해도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며 제 살 집 하나를 마련하지 못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철거당해 이곳 저곳 산동네를 떠돌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 단지 가난이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야학에 뛰어들게 되고 결국 공안당국에 끌려들어가 취조를 받게 된다. 경찰은 취조실 책상위에 종이와 연필을 내주면서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 그려! ”

“ 네??? 뭘요? ”

“  조직표 그리라구..니 배후랑...주변 인물들... ”




 

그 장면은 드라마가 아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공안탄압이 자행되던 그 시절의 실제 상황이었던 것.  이것이 바로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형 최수종은 누나의 일로 해서 우여곡절 끝에 하필 이승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사고를 내고 조직폭력배인 이승연의 삼촌 부하들에게 쫓겨 흠씬 두들겨 맞고 다시는 부잣집딸내미를 넘보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테러를 당한다. 언감생신...가난뱅이 니들 주제에 우리 효경이를 넘봐???

아무리 원수의 딸과 연애질하는게 무협지 정석이며 뻔한 스토리긴 해도 기물하나 파손하고 딸내미하고 연애질 좀 했기로서니 앞길이 구만리 같은 고딩 남자애를 상대로 어른 조폭이 그렇게 마구 줘 패다니....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아무리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이라도 그렇지 그 황당하고도 부당한 상황에 열받지 않을 시청자가 어디 있을까.....주목할 점은 이런 폭력사태가 드라마가 끝날때까지 계속 되는 갈등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 드라마의 배경은 70-80년대....작가는 당시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를 “ 고딩애들 줘패는 무식한 어른”이라는 키워드로 시종일관 담아내고 있다. 결국 찬혁이 온갖 핍박을 당하다 반신불수까지 되고마는 상황은 조폭과 결탁해서 벌이게 되는 효경이네 가족에 대한 배용준의 복수극으로 치닫는다.

당시 독재정권 실세와의 친분을 자랑하던 건설 조폭 경향의 기업가인 효경이 아버지 일당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배용준은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역시 조폭이 운영하는 기업의 실세로 등극하게 되고 우연찬은 기회로 효경이 아버지 회사를 결국 도산하게 만들어버린다.



 

“ 다 자업자득이야. 삼촌이 저지른일 삼촌이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세요. 성찬혁에게 가서 무릎꿇고 사죄하세요. 그게 순서에요. 회사 부도막는게 중요한게 아니구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 기업을 하면 뭘해요. 누굴위해 뭘 위해서요 돈이라는 흉기로 폭력을 휘두르기위해서요? 난 찬우가 옳은일을 하고있다고 생각해. 양심이 마비된 사람에게 기업을 맡기는건 옳지않아요. 선량한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망가뜨려놓고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그런 사람의 기업은 파산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아니 파산해야해.”



 

작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비로소 90년대 초반 녹녹치 않게 매스컴에 등장한 노동자 서민의 권리...그리고 독재정권과 결탁한 기업의 노동자 탄압이라는 시대의 화두를 효경의 대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 어디에도 효경이 아버지가 악덕기업주였다는 정치사회적인 구체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돈이라는 권세가 가난한 한 청년의 일생을 무심히 망쳐버리고도 당당할 수는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고 따듯하게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부당한 폭력과 억압이 배용준이란 개인을 통해서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숨죽이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당시 시청률 65프로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게 한 시대적 배경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드라마가 끝난 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88만원 비정규직이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시대의 암담함은 여전하기만 한것을..... ㅜㅜ



배용준 캐릭터 그 까칠함에 대하여...


첫사랑이란 드라마 타이틀을 보자면 당연히 이승연과 최수종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신에게 끝없이 가해지는 테러에도 불구하고 지고지순 첫사랑 그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는 온화한 사랑을 지키며 복수는 해서 뭣하나 시간을 되 돌릴수는 없다는 찬혁이나

첫사랑을 잃은 멍든 가슴을 안고 십여년을 그 이름만 부르다 목이 쉬련만 부잣집 딸내미답게 실연의 상황에서도 파리유학에 외로울땐 꽃바구니 선물인 멋쥔 오라버니가 항상 주위에서 챙겨줘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는 효경이보다는

첫사랑을 형에게 양보한후 형을 대신해 집안을 일으키고자 오로지 이를 악물고 아르바이트에 사법고시에 불철주야 매달리다가... 결국 세상의 부조리가 법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구나 깨달은 순간 법전을 내던지고 조폭과 결탁..차가운 카리즈마로 복수극을 꾸미는 찬우가 이 드라마를 끌어갔던 진짜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그는 또한 이 드라마에서 누나 송채환에게 보여주는 애정의 캐릭터로 단숨에 그 독특한 까칠함의 미학을 선사한다.



 

그는 짝사랑 이승연을 생각하면서 꺽어온 꽃을 뜬금없이 누나 송채환에게 갖다주면서 사랑한다고 포옹을 하거나...


저녁밥상을 차리면서 누나가 "나는 아까 다 먹었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던 갈치튀김" 을

나중에 누나가 몰래 생선가시를 핥아먹고 있는 걸보고는 혼자 속상해하다가

알바 첫월급날 생선을 한보따리 사들고 와서 누나 혼자 다 먹으라고 하거나...


누나가 이웃집 주정남이란 사내와 즐겁게 놀고 있는걸 보자 열불나서

"왜 아무남자와 속도 없이 놀고 있냐"며 버럭 버럭 화를 내고는 미안했는지

양품점에서 블라우스를 사서 누나에게 선물한다던가...


결국 주정남이란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누나에게

절대 안된다면서 매형감은 자기가 골라주겠다면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참으로 까칠하면서도 귀엽고 속정깊은 캐릭터가 아닐수 없다.


또한 그는 몇년을 따라다니던 최지우에게 곁눈질 한번 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법고시 패스를 위해 학교와 도서관만을 드나든다. 게다가 빈민활동을 한답시고 싸구려 감성에 젖은 부유한 운동권학생을  경멸하며 가난이 자신에게는 낭만이 아닌 삶 그 자체라며 시니컬해 한다. 형의 복수가 끝나고 다시 고시생으로 돌아간 후 칠년만에 다시만난 그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최지우.......

그때에도 그는 특유의 까칠함을 잃지 않는다.

" 몇년전 저한테 시험 합격하라고 준 만년필 이제야 써먹게 될것 같아요. 근데 어쩌죠. 다시 연락 못할것 같은데...뭐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아도 할수 없구요.. "


최근 목발짚고 나타난 미스터배의 부드럽고 중후한 면모를 보니 한동안 그의 고정 이미지였던까칠함의 묘미를 새삼 곱씹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깊이가 더해지는 마스크를 가질 수 있다는건 분명 연기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우짜든동....

보고싶으면 언제든 핸폰으로 밤을새우고 백일기념 커플링을 주고받으며

심심치 않게 지하철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요즘남녀의 연애질을 보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하세월에 찢어놀래도 찢어지지 못하고 초딩때부터 이십대후반까지 징글징글하게도 장장 십여년을 생난리 부르스를 쳤던 그 옛날 고랫적 신파조 연애질 이야기를 다시 보고나서 나는 생각한다.

첫사랑.....


갖 태어난 오리가 엄마라며 따라오는 소녀처럼

영원히 지워지지않는 기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