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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을 치다

바람이었나.


 

보험서류문제로 근무시간에 외출을 나왔다. 보험 계약자 명의를 바꾸러 가는 길이었다. 맞벌이에 자식도 없으니 떼는 세금이 만만치 않다. 남들은 몇십만원씩 환급인데 연말정산에서 제일 구찌가 큰 보험공제가 두당 이백가량 넘는데도 내 명의앞으로 계약이 되어 있는 통에 남편앞으로는 공제가 되지 않아 돈을 엄청 물어내니 얼마나 열이 받던지... 


가는날이 장날이라...모처럼 낯에 외출을 했는데 바람이 엄청 불어댄다. 지하철 송파역 앞을 지나가니 낯익은 건물이 보인다. 00고시학원...2년전 거의 10개월 동안 저곳을 매일 매일 다녔더랬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들었지만 사실 난 그때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억지로 잊기 위해서 뭔가에 몰입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심리상태... 그 자격증을 꼭 따야 된다는 생각도 크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잠깐씩 스쳐지나간다. 그 후 한 두명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합격을 못해서 그랬는지 괸히 의기소침해져서 그냥 맥없이 인사만 하고 헤어졌지만.

학원에서 만난 사람 중에 친했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학원을 안나오면서 난 사람들과 별로 말을 섞지 않고 무뚝뚝하게 지냈다. 모처럼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언니라 그녀에게 힘든 사소한 직장 얘기 따위 등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친해졌는데 학원을 바꾼건지 갑자기 그녀가 나오지 않아 연락이 뚝 끊기니 웬지 모를 허무감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딱히 그녀가 잘못한건 없는데도... 난 왜 여기저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여럿이 어울려 대충대충 말하고 지내는게 잘 안되는지 모르겠다. 별 의미 없는 얘기라도 떠들어 대면서 사람을 그렇게 사귀는 건데 말이다.

그래도 학원앞을 지나가니 그때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아마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ㅎㅎㅎ


송파엔 미술학원이 많다. 그러고 보니 나도 고1때였던가? 미술부에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술선생님이 미술시간에 내 그림을 보더니 나에게 한 첫마디가 이거였다.


“ 어머...어떡하니... ”


사실 난 그림을 잘 그렸다. 초등학교때는 상도 타고 그랬는데 그림쪽으로 나갈 생각이 별로 없어서 소홀히 했던거고 그래선지 기초연습이 부족한 탓에 기분이 별로 안좋을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때도 아마 컨디션이 안좋았는지 그냥 종이위에 휘적거리고 있을때였다.

1년동안 미술반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 후엔 다른 취미부서를 찾아가 버렸으니까. 선생님의 그 말이 지금도 생각나는 걸 보니 아마 내가 그때 선생님한테 많이 서운해 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만 나온다. 별 말도 아닌걸 가지고...ㅋㅋ

아마 그때의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 후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그림을 배우려고 생각중이니 나도 모르게 실실 또 웃음이 나온다. 그땐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마을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뜻밖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제는 너를 잊어야 하나. 그냥 스쳐가는 바람처럼. 파란 미소를 뿌리던 꿈의 계절을 모두 잊어야 하나.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우리는 헤메 다녔지. 조금은 외롭고 쓸쓸했지만 그것은 낭만이었지. 만나면 할말을 못하고 가슴을 태우면서도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끝없이 깊어갔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버스안 내 또래로 보이는 아줌마들한테 말을 걸뻔했다.

 "어머 이 노래 나와요. 생각나죠? 정수라의 바람이었나....한 이삼십년 된 노래네요. 아 중학교때 참 좋아했는데."

단발머리 시절.....공테이프를 카세트에 끼워 놓고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얼른 녹음버튼을 누르고 따라 불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오늘처럼 바람이 쒱하니 부는 날 여유로운 오후 버스 차창밖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늦겨울 풍경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듣고 있자니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부는 것 같다.....그래 그것은 낭만이었다....그동안 스쳐지나간 모든 일들이 모든 만남들이 아득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다시 십년이 지난 후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때의 나도 아마 지금처럼 웃고 있겠지....그래 그 모든건 낭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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